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(문단 편집) == 대립의 진행 == [[일본육군사관학교|육군사관학교]]와 [[일본해군병학교|해군병학교]][* 해군/병/학교가 아니라 해군/병학(兵學, 즉 군사학)/교이다. 즉, 해군의 병법을 배우는 군영이라는 뜻이다. 육군사관학교의 원래 이름도 병학교였다.참고로 [[대한민국 국군|한국군]]도 초창기에는 [[해군사관학교|해사]], [[공군사관학교|공사]]를 각각 해군병학교, 공군병학교라고 불렀었다.]가 생기고 나서야 [[지연|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승진 우대 관행]]이 사라졌다.[* 그 대신 육군대학, 해군병학교 성적이 향후 승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관행이 생겨버렸다. [[일본군/문제점]] 문서 참고.] 그리고 이 때부터는 출신 번이 아닌, 육군과 해군 그 자체로서 대립하기 시작했다. 그 전까지는 지연은 달라도 전체적인 인맥은 어느 정도 섞여 있었지만, 육군대학과 해군대학이 생긴 뒤엔 아예 '학연' 단계에서 분리가 이루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을 맞댈 일이 없는 집단이 된 것이다. 여기에 육·해군은 서로와의 차별화를 명분으로 다른 용어를 썼다. 교육기관·총사령부·총사령관을 육군은 육군사관학교·참모본부·참모총장, 해군은 해군병학교·군령부·군령부총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. 육군에서 [[점호]](點呼, 덴코)라고 하는 것을 해군에서는 [[순검]](巡檢, 준켄)[* 한국 해군 및 해병대에서도 사용했던 용어이다. 현재는 전군이 점호로 통일되었다.]이라 불렀다. 심지어 '[[대장(계급)|대장]]'이라는 단어를 한 쪽은 '다이쇼', 다른 한 쪽은 '타이쇼'라 불렀다. 여기에 군대 내 특유의 [[작은 사회]] 및 소집단주의와 관료주의가 결합하여 전체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자신의 조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도 컸다. 이것은 비단 육·해군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였다. 그러니까 업무가 조금이라도 겹치는 웬만한 조직 간에는 거의 다 대립관계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. 일본군 내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대립, 육군 [[일본 제국 육군/헌병|헌병]]·경찰의 대립, [[일본제국 경찰]]에서는 일반경찰·[[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|특별고등경찰]]의 대립이 있었으며 육군에서는 [[육군성]]·참모본부·교육총감부의 대립, [[관동군]]·[[대본영]]의 대립[* 관동군은 [[천황]] 직속이었기 때문에 '''그 대립 심한 일본군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했다.''' 비교적 군령부와 상의를 하던 연합함대와 달리 여기는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말을 '''무시했다.'''] [[보병]] 병과와 [[기갑]] 병과의 대립[* [[치하]]도 원래 대구경 포를 탑재할 수 있게 대형 차체로 설계하려 했으나, 전차가 단독으로 싸워 전공을 독식할 것을 반대한 보병 장교들의 질투와 간섭으로 보병을 지원하는 수준으로 재설계되었다.]이 있었다. 해군에서는 [[해군성]],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군령부|군령부]], [[연합함대]]의 대립, 연합함대[* 연합함대 기함의 명칭은 조슈 번 서부의 옛 지명인 나가토노쿠니(長門國)에서 따온 [[나가토급 전함|나가토(長門)]]였다. 일본군의 뿌리를 생각하면 웃기지만 어차피 나중에 군부 인사가 지역 중심으로 채워지지 않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다.]·군령부[* 그나마 이곳은 좀 나았다. 연합함대는 관동군에 비해 멋대로 날뛰지는 않았고 비교적 군령부와 상의를 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. 다만 [[야쿠쇼 코지]]가 주연을 맡은 영화 〈연합함대 사령장관 [[야마모토 이소로쿠]]〉에서는 오히려 군령부 총장이 자기네 라인인 [[나구모 주이치]]를 불러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지시와는 별개로 다른 사항을 지시하는 등 명령 체계가 망가진 폐해를 묘사하고 있다.], [[함대]]·[[해병대|육전대]]·[[항공대#s-1]], 조약파[* [[워싱턴 해군 군축조약]]과 [[런던 해군 군축조약]]을 지지하는 파벌이었다. 대표적인 인물로는 [[야마모토 이소로쿠]]를 비롯한 해군 좌파 3인방이 있었다.]·함대파[* 그 두 조약을 반대하는 파벌이었다. 대표적인 인물로는 [[나구모 주이치]], [[나가노 오사미]] 등이 있었다.]가 서로 열심히 대립했다. 물론 같은 파벌 내에서도 암투와 경쟁이 치열했다. 일본 육군과 해군은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[[쇼와 덴노|히로히토]] 황태자의 황태자비 선정을 놓고도 격렬하게 대립했다. 1918년에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가문의 딸인 [[고준 황후|구니노미야 나가코]]가 황태자비로 선정되었는데, 나가코의 어머니 구니노미야 치카코(久邇宮俔子)는 사쓰마(해군)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(島津忠義)의 딸이었다. 당연히 육군(조슈) 세력은 무척 반발했고,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, [[사이온지 긴모치]], [[하라 타카시]] 등은 나가코를 반대했다. 하지만 구니노미야 가문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, 길고도 지루한 5~6년의 싸움 끝에야 나가코는 히로히토 황태자와 무사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